늙음에 이르러 生의 근원을 탐구하다

오경진 기자
수정 2025-05-22 23:34
입력 2025-05-22 23:34
봄날의 이야기
오정희 지음
삼인/160쪽/1만 5000원
‘암캐’ 눈으로 生의 이치 그려 내고생명 잉태하는 모체, 집요한 탐구
늙음 문제 직시하는 ‘글 쓰는 여성’
“이젠 끝까지 가 보는 글쓰기 해요”

늙음에 이르러 삶의 정체를 캐묻는다. 늙었다는 건 그만큼 생(生)을 오래 쥐고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생의 비밀은 좀체 풀리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더 멀어질 뿐이다. 과작의 노(老)작가가 그 비밀에 다가가고자 펜을 들었다. 소설에서 그는 암캐가 돼 보기도, 죽은 어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 보기도 한다.
소설가 오정희(78)의 신작 단편집 ‘봄날의 이야기’에 실린 세 편의 작품은 생명의 기원으로서의 모성, 나아가 그 생명을 잉태하는 모체(母體)를 향한 집요한 탐구처럼 읽힌다. 계절이 마침내 여름으로 접어든 듯한 5월의 끝자락. 기기묘묘한 ‘봄날’의 이야기가 당도했다.

삼인 제공
“그가 다가와 엉덩이에 코를 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등에 올라탔다. 더없는 다정함으로 목덜미를 지그시 물며 온 힘을 다해 앞다리로 내 아랫배를 조였다. … 그의 몸에서는 그가 달려온 모든 길과 물과 비와 바람과 햇빛이, 그것들의 기억이, 오직 살고자 하는 아름다운 본능과 생의 무위한, 지금 이 순간의 기쁨만이 숨쉬고 있다. 그의 애탐, 갈구와 갈망이, 안타까운 헐떡임이 내 안의 가장 깊은 곳, 어둡고 따뜻한 곳으로 온 힘을 다해 들어온다.”(‘봄날의 이야기’ 부분·49쪽)
표제작 ‘봄날의 이야기’의 화자는 암캐다. 개의 암컷을 뜻할 뿐인 암캐라는 말은 어째서 이토록 어감이 사나운가. 여기에는 어쩌면 인간 남성 주체의 시선이, 주체 이외 모든 걸 타자화했던 역사가 담겨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암캐를 화자로 내세우는 걸 넘어 작가는 말 그대로 암캐가 되기로 한다. 암캐로서 세계를 마주하고 그것의 눈에만 포착되는 슬픔을 그려 낸다. 생리(生理)는 생의 이치. 소설엔 생리적인 것이 가득하다. 눈물을 흘리고 오줌을 누며 마지막에는 교미도 한다. 점잖은 독서가가 읽기에는 다소 머쓱한가. 하지만 생명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천박하다면 천박하고, 숭고하다면 숭고하다.
“어머니의 피가 엉겨 나의 근원이 되고 그 자궁 안에 깃들어 온전한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 어머니의 몸속 좁고 어두운 산도를 단단히 움츠린 몸으로 빙글빙글 돌아 세상으로 나왔다는 것이 … 일찍이 한 몸이었던 존재가 이제 늙은 여자, 늙어 가는 여자로 마주 앉아 옛일을 이야기한다는 그러한 이치가 새삼 신비롭고 깊은 슬픔을 느끼게도 했다.”(‘나무 심는 날’ 부분·107쪽)
‘보배’와 ‘나무 심는 날’에서 오정희는 늙음의 문제를 직시하고 있다. ‘나무 심는 날’의 화자는 글 쓰는 여성이다. 그는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차츰 늙어 가는 자신에게서 죽은 어머니의 얼굴을 발견한다. 한 생명을 잉태했던 탄탄한 몸은 어느새 늙고 결국엔 한 줌의 재로 사라진다. 덧없는 삶에서 글을 쓰는 일이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나무 심는 날’의 화자는 마치 오정희 본인인 것 같기도 하다. “모든 삶의 순간은 미스터리다.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가 되어 살아보는 것, 그것은 가면에의 욕망일까, 자기 실종의 욕망일까.”(‘나무 심는 날’ 부분·83쪽)
1968년 일간지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뒤 올해로 57년이 됐다. ‘불의 강’, ‘유년의 뜰’, ‘불꽃놀이’를 비롯한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작품들은 하나하나 한국문학의 보물이다. 이상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받았다. 대면 인터뷰는 고사하겠다는 오정희에게 그래도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늙음과 글쓰기, 늙음과 문학의 관계가 무엇인지’ 물었다. 오정희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그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라며 이렇게 답했다.
“젊을 땐 폭죽이 터지는 듯한 감각을 가지고 글을 썼죠. 삶의 팽팽한 긴장으로 작품을 썼고, 때때로는 ‘글을 위한 글’을 쓸 때도 있었어요. 하지만 늙음의 글쓰기는 거기서부터 자유로워지더군요. 어디서 멈추지 않고 그야말로 갈 수 있는 곳, 끝까지 가 보는 글쓰기. 왜인지 폭풍의 한가운데 서 있는 오래된 나무가 떠오르기도 하고요.”
오경진 기자
2025-05-23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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