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뒤 기적…첫 MZ세대 성인 카를로, 마지막 남긴 말은 [핫이슈]

윤태희 기자
윤태희 기자
수정 2025-09-07 11:33
입력 2025-09-07 10:52

노숙인 돕고 신앙 전파한 ‘하느님의 인플루언서’, 바티칸서 성인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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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카를로 아쿠티스 공식 홈페이지에 게시된 생전 모습. 오른쪽은 2006년 15세로 선종한 뒤 이탈리아 아시시 성지에 안치된 그의 시신. 출처=carloacutis.com·AP 연합뉴스
왼쪽은 카를로 아쿠티스 공식 홈페이지에 게시된 생전 모습. 오른쪽은 2006년 15세로 선종한 뒤 이탈리아 아시시 성지에 안치된 그의 시신. 출처=carloacutis.com·AP 연합뉴스


백혈병으로 15세 짧은 생을 마감한 이탈리아 소년 카를로 아쿠티스(1991~2006)가 교황청이 인정한 두 차례의 기적을 바탕으로 7일(현지시간) 바티칸에서 성인 반열에 오른다. 온라인을 통해 가톨릭 신앙을 전파해 ‘하느님의 인플루언서’로 불린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런던 태생 15세에 백혈병으로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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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현지시간) 시성식을 앞두고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외벽에 걸린 카를로 아쿠티스의 대형 태피스트리. 순례객들이 희년 행사에 맞춰 성문을 통과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7일(현지시간) 시성식을 앞두고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외벽에 걸린 카를로 아쿠티스의 대형 태피스트리. 순례객들이 희년 행사에 맞춰 성문을 통과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번 시성 미사는 바티칸 시간 오전 10시 한국 시간 오후 5시 30분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레오 14세 집전으로 거행된다.

카를로는 출생 연도상 밀레니얼 세대(M세대)에 속하지만 인터넷을 일상 언어처럼 활용한 ‘디지털 네이티브’ 이미지 때문에 일부 외신은 그를 Z세대 성인이라 소개했다.

1991년 런던 포틀랜드 병원에서 태어난 카를로는 유년기에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 밀라노로 이주했다. 부모가 독실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어린 시절부터 매일 미사에 참여했고 7세에 첫영성체를 받았다. 또 노숙인에게 음식을 나누고 장애 학우를 도우며 “약자를 위해 자기 것을 아낌없이 내놓던 아이”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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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카를로 아쿠티스. 부모가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매일 미사에 참석했고 7세에 첫 영성체를 받으며 깊은 신앙심을 보였다. 출처=carloacutis.com
어린 시절의 카를로 아쿠티스. 부모가 독실한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그는 매일 미사에 참석했고 7세에 첫 영성체를 받으며 깊은 신앙심을 보였다. 출처=carloacutis.com


BBC는 카를로가 태어난 런던에서도 그를 기리는 장소가 생겼다고 보도했다. 첼시에 있는 고통의 성모(Our Lady of Dolours) 성당은 카를로가 세례를 받은 곳으로 세례반과 고해소 한쪽을 성소로 꾸몄다. 안에는 그의 머리카락 한 올을 담은 성유물이 보관돼 있어 순례객들이 찾고 있다고 소개했다.

카를로는 2006년 가을 급성 전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고 불과 열흘 만에 1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는 순간에도 그는 고통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앞서 언급한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어머니 안토니아 살자노는 이탈리아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인터넷으로 신앙 전파…‘하느님의 인플루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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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곁에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 카를로 아쿠티스의 초상화. 그는 성체를 주제로 한 웹사이트를 제작하며 ‘하느님의 인플루언서’로 불렸다. 자료사진
예수 그리스도 곁에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 카를로 아쿠티스의 초상화. 그는 성체를 주제로 한 웹사이트를 제작하며 ‘하느님의 인플루언서’로 불렸다. 자료사진


카를로는 컴퓨터 코딩을 독학해 가톨릭교회가 수 세기에 걸쳐 인정한 성체 기적 100여 건을 정리한 다국어 웹사이트 ‘세계 성체 기적(The Eucharistic Miracles of the World)’를 제작했다. 이 공로로 그는 ‘하느님의 인플루언서(God’s Influencer)’라는 별칭을 얻었고 교회 안팎에서 디지털 시대 신앙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생전 존경하던 성 프란치스코의 고향 아시시를 자신의 안식처로 택해 달라고 요청했고 현재 그의 유해는 아시시 산투아리오 델라 스폴리아치오네 성지에 안치돼 있다. 카를로는 평소 차림 그대로 청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안치됐으며 시신 위에는 밀랍 모형이 덮여 있다. 매일 수천 명의 순례객이 그의 무덤을 찾는다.

현지에서는 그의 시신이 “완벽히 보존됐다”는 보도가 나오며 화제를 모았다. 실제로 2019년 유해 발굴 당시 신체가 크게 훼손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고 교회는 이를 “통상적인 부패 과정을 거쳤지만 형태를 유지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이후 전문가들이 얼굴에 실리콘 마스크와 밀랍 처리를 해 지금은 미소 짓는 듯한 모습으로 안치돼 있다. 이 때문에 순례객들은 카를로가 마치 살아 있는 청소년처럼 보존된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교황이 인정한 두 차례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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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아쿠티스의 첫 번째 기적 사례로 언급된 브라질 소년 마테우스 비아나. 그는 희귀 췌장 기형을 앓다가 2013년 아쿠티스의 성유물에 기도한 뒤 완치된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현지 언론 캡처
카를로 아쿠티스의 첫 번째 기적 사례로 언급된 브라질 소년 마테우스 비아나. 그는 희귀 췌장 기형을 앓다가 2013년 아쿠티스의 성유물에 기도한 뒤 완치된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현지 언론 캡처


성인 추대에는 사후 기적이 필수다. 교황청은 카를로가 행했다고 전해지는 두 차례의 기적을 공식 인정했다. 첫 번째는 2013년 희귀 췌장 기형을 앓던 브라질 소년이 카를로의 티셔츠 성유물을 만진 뒤 병을 완치한 사건이다. 두 번째는 2022년 피렌체에서 자전거 사고로 뇌 손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진 코스타리카 출신 여대생이 그의 무덤 앞에서 어머니가 기도한 후 의식을 회복하고 완치된 사례다. 이 두 사건은 교황청 의학위원회가 검증했고 교황이 최종 승인했다고 가톨릭뉴스에이전시(CNA)와 바티칸뉴스가 밝혔다.

BBC는 카를로의 어머니가 “첫 기적은 장례식 날 일어났다”고 증언했다고 알렸다. 유방암 환자가 카를로에게 기도한 뒤 곧 시작할 예정이던 항암치료가 필요 없을 만큼 암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사례는 아니지만 추종자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는 기적으로 알려져 있다.

성인 추대 과정 이례적으로 빠른 절차카를로의 시성 절차는 교황청에서도 이례적으로 빨리 진행됐다. 보통 수십 년에서 수 세기까지 걸리지만 그는 2006년 선종 이후 불과 10여 년 만에 시성 단계에 도달했다. 일부 전통주의자들은 “교회가 젊은 세대와의 연결을 위해 ‘Z세대 성인’을 의도적으로 앞세운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다고 이탈리아 일간 라 레푸블리카가 보도했다.

종교학자 케네스 우드워드는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의 데이비드 존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전에는 최소 50년을 기다려야 성인 후보의 명성이 진정성 있는지 검증됐다”며 “카를로는 인터넷을 통해 명성이 확산된 사례로 성인 심사 기준의 새로운 시험대에 올랐다”고 평가했다.

가족과 동시대인들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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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아쿠티스를 안고 있는 어머니 안토니아 살자노. 부모가 독실한 신앙인은 아니었지만 카를로는 어린 시절부터 매일 미사에 참석하며 깊은 신앙심을 보였다. 출처=carloacutis.com
카를로 아쿠티스를 안고 있는 어머니 안토니아 살자노. 부모가 독실한 신앙인은 아니었지만 카를로는 어린 시절부터 매일 미사에 참석하며 깊은 신앙심을 보였다. 출처=carloacutis.com


카를로의 어머니는 AFP통신에 “아들은 평범한 10대였지만 마음을 하느님께 열었다”고 말했다. 아버지 안드레이 아쿠티스도 같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신발 두 켤레를 사주겠다고 하면 아들은 ‘한 켤레면 충분하다. 남은 돈으로 굶주린 사람들을 돕자’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친구들은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카를로가 축구와 비디오 게임 코미디 프로그램을 즐겼지만 항상 약자에게 친절했고 종교적 신념에도 충실했다”고 증언했다.

BBC는 런던 청년 디에고 사르키시안의 발언을 인용했다. 그는 “카를로가 슈퍼마리오 같은 비디오게임을 즐겼다는 점이 친근하다”며 “청바지를 입은 성인이 우리와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교황 레오 14세 첫 시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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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14세 교황이 9월 6일(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희년 특별 알현에 참석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레오 14세 교황이 9월 6일(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희년 특별 알현에 참석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이번 시성식은 올해 5월 미국 출신으로 선출된 교황 레오 14세가 집전하는 첫 성인식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사실 카를로의 시성은 지난 4월 27일 예정돼 있었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으로 연기됐다.

아시시 대주교 도메니코 소렌티노는 현지 기자회견에서 “프란치스코 시대의 아시시가 이제 카를로의 시대를 맞이했다”며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그는 젊은이들의 나침반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SNS 반응과 현지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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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30일(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교황 레오 14세의 일반 알현 때 한 청년이 카를로 아쿠티스의 초상화를 들어 보이고 있다. 카를로는 이달 7일 MZ세대 첫 성인으로 시성된다. 로이터 연합뉴스
지난 7월 30일(현지시간)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교황 레오 14세의 일반 알현 때 한 청년이 카를로 아쿠티스의 초상화를 들어 보이고 있다. 카를로는 이달 7일 MZ세대 첫 성인으로 시성된다. 로이터 연합뉴스


아시시와 로마 일대는 이번 주말 내내 순례객과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상점들은 그의 얼굴을 새긴 성상 열쇠고리 크리스마스 장식품까지 판매하며 열기를 더한다. 일부 청년 신자들은 “카를로 덕분에 가톨릭이 다시 멋져졌다”고 말했다고 로이터통신이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성인으로서의 공적보다도 카를로가 21세기 신세대에게 신앙을 ‘동시대 언어’로 전달한 상징”이라는 점에 큰 의미를 둔다고 분석했다.

윤태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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